“제주대첩은 한반도와 해상 요충지를 왜구로부터 지켜내”
“제주대첩은 한반도와 해상 요충지를 왜구로부터 지켜내”
  • 김형훈 기자
  • 승인 2022.09.23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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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묘왜변 따라잡기] <9> 을묘왜변 첫 학술세미나

을묘왜변을 역사문화 자원으로 이끄는 출발점

“제주을묘왜변 승전기념사업회 조성하자” 제안

[미디어제주 김형훈 기자] 1555년(명종 10) 왜구가 일으킨 을묘왜변은 철저하게 왜곡돼 있다. 역사와 관련된 궁금증을 해소해주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물론, 사람들이 자주 찾아서 검색하는 포털사이트도 마찬가지이다.

디지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을묘왜변’을 검색하면 다음처럼 나온다.

“1555년(명종 10) 왜구가 전라남도 강진·진도 일대에 침입해 약탈과 노략질한 사건.”

디지털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사전이 설명하는 '을묘왜변'. 제주 관련은 없다. 미디어제주
디지털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사전이 설명하는 '을묘왜변'. 제주 관련은 없다. ⓒ미디어제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을묘왜변의 다른 이름을 ‘달량왜변’이라고 부른다. 이는 왜구의 일상적 짓거리인 ‘노략질’에만 초점을 둔 것으로, 을묘왜변을 ‘아주 작은 사건’에 불과하다고 보는 시각과 다르지 않다. 포털사이트의 을묘왜변 역시 비슷하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등을 들여다보면 ‘승리’는 보이지 않는다. 더구나 제주는 들어 있지 않다. 을묘왜변을 겪은 당시 조정은 제주에 쳐들어온 왜구와의 승리와 관련, 상당히 고무돼 있었음을 <미디어제주> 기획(2022년 9월 15일자 기사 ‘제주전투는 적은 군사로 왜구 물리친 큰 승리’)에서 짚기도 했다. 명종은 제주의 승리를 기뻐하며 ‘대첩(大捷)’이라고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검색을 통해서 만날 수 있는 을묘왜변 정보는 제주에서 일어난 전쟁에 대한 이야기도 없고, 물론 ‘대첩’도 없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정부의 연구조직인 한국학중앙영구원이 집대성한 자료이다. 공신력을 지녀야 할 백과사전이, 제대로 된 정보를 전달하지 못함으로써 오히려 을묘왜변 왜곡에 앞장서는 셈이다.

다행이라면 467년 전에 일어난 을묘왜변을 이제라도 제대로 밝혀보자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는 점이다. 9월 22일 진행된 학술세미나 ‘을묘왜변과 지역사회의 대응, 역사문화자원화’는 첫 출발점이다.

이날 학술세미나는 을묘왜변 당시 격전지였던 제주도와 영암지역의 다양한 이야기를 담아서 풀어냈다.

제1주제 ‘을묘왜변과 영암의 대응’은 줄곧 패배하다가 왜구를 물리친 영암지역에 눈길을 주고 있다. 영암전투 승리는 관군은 물론, 양달사를 중심으로 한 의병의 활약에 중점을 둔다.

영암전투는 여러모로 중요했다. 을묘왜변의 첫 승리였으며, 전남지역에서 왜구를 물러나게 만드는 전투이기도 했다. 만일 영암전투에서 승리를 하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더 큰 문제가 발생할 수 있었다는 사실도 이날 학술세미나에서 밝히고 있다.

을묘왜변을 일으킨 왜구는 전남지역을 단순하게 ‘노략질’을 하러 들어온 게 아니라, 조선을 발판으로 명나라를 침략하려는 야욕의 현장으로 삼았다.

전남대문화유산연구소 정현창 연구원은 “을묘왜변이야말로 왜구들이 수백 년에 걸쳐 조·중 침략으로 쌓은 경험에서 얻은 자신감으로 일본이 품고 있던 ‘몽상의 실현장’이라고 할 수 있다”며 “이후 같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본격적이고 확장된 현장이 임진왜란이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제주도와 제주연구원이 주최한 ‘을묘왜변과 지역사회의 대응, 역사문화자원화’ 학술세미니가 9월 22일 제주아스타호텔에서 열렸다. 미디어제주
제주도와 제주연구원이 주최한 ‘을묘왜변과 지역사회의 대응, 역사문화자원화’ 학술세미니가 9월 22일 제주아스타호텔에서 열렸다. ⓒ미디어제주

제2주제는 ‘을묘왜변과 제주의 대응’으로, 승리의 역사를 재조명할 필요성이 있음을 강조하는 자리였다. 홍기표 전 성균관대 사학과 겸임교수는 “제주 을묘왜변은 조선시대에 들어와 제주가 처음으로 겪은 대규모 외적의 침입이었고, 제주민은 이를 대첩으로 이끌어 시련을 극복했다. 이는 비단 제주만의 승리가 아니라, 조선 을묘왜변의 최종 승리였다”면서 “제주 을묘왜변의 대첩은 일본과 한반도 및 중국과 연결되는 해상 요충지 제주를 왜구로부터 지켜냈다는 점에서 동아시아 평화 정착에 기여했다”고 제주승리의 가치를 이야기했다.

제주승리는 준비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정부의 지원 없이 이뤄낸 ‘대첩’이라는 점에서 당시 제주사람들이 얼마나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애를 썼는지 유추 가능하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날랜 군사 70명을 모으고, 말을 타고 달려서 왜구의 선봉을 깨뜨린 인물이 나온다. 활을 쏘아 적장을 쓰려뜨린 제주인도 나온다. 꿈적도 하지 않던 왜구의 전선을 무너뜨린 이들은 김직손, 김성조, 이희준, 문시봉, 김몽근 등이다. 문제는 명종 스스로가 ‘대첩’이라고 불렀음에도, ‘대첩’이후 제주인들에 대한 대접은 너무 박하다는 점이다.

김석윤 제주대 강사는 “을묘왜변과 관련된 제주 인물들은 관찬의 기록에서도 중요하게 대접받지 못하고 있다. 제주사람보다는 중앙에서 파견된 목사의 역할을 높게 평가하고 있다”며 “제주를 오롯이 기억하기 위해서는 선택적으로 역사인물을 소환하는 것이 아니라 긍정이든 부정이든 당대의 사회구조 속에서 적극적으로 모순을 극복하고 실현하고자 했던 사람들에 대한 역사복원 작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제3주제는 ‘역사문화자원의 문화원형 및 콘텐츠 발굴’로, 승리의 역사를 제대로 전승시킬 필요성이 있다는 공감대를 마련하는 자리였다.

현혜경 제주연구원 책임연구원은 “을묘왜변과 관련된 역사문화자원과 콘텐츠를 관리할 주체가 없다”며 “제주 유일의 승전사를 기념하는 ‘제주을묘왜변 승전기념사업회’ 조성을 제안한다”고 밝혔다.

을묘왜변 첫 승리를 기록한 영암지역은 ‘양달사현창사업회’를 꾸려서 전투의 승리는 물론, 다양한 콘텐츠를 만들고 있다.

9월 22일 열린 을묘왜변 관련 학술세미나. 미디어제주
9월 22일 열린 을묘왜변 관련 학술세미나. ⓒ미디어제주

이날 학술세미나는 첫 승리를 한 영암과 마지막 승리를 통해 ‘제주대첩’을 완성한 두 지역의 만남이라는 의미가 있다. 더욱이 이번 만남은 을묘왜변이라는 숨겨진 역사를 제대로 들어내는 시작이라는 데 있다. 특히 이날 학술세미나는 전남과 광주 지역의 교수와 연구진들이 대거 참여하며 관심을 보였다. 아쉬운 점은 제주대 관련 연구자들은 없었다.

9월 22일 학술세미나는 아쉬움과 가능성을 모두 담고 있다. 비록 제주대 연구진들이 없다는 아쉬움은 있지만, 앞으로는 그들의 몫도 기대해본다. 역사화 작업을 제대로 진행시키는 일과 함께 도민들에게도 ‘제주대첩’을 제대로 알릴 필요성이 있다. 오는 2025년은 을묘왜변 발발 470주년이다. 왜구 1000여명을 몰아낸 ‘제주대첩 470주년’을 대대적으로 기념하는 날을 혼자만의 상상으로 끝나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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