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섶섬이 보이는 풍경 '이중섭미술관'
섶섬이 보이는 풍경 '이중섭미술관'
  • 현도영 기자
  • 승인 2005.07.02 16: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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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섭 작품.피난지 등 1950년대 서귀포 모습 담아

1951년 남제주군 화순항, 한 남자가 일본인 한 여자와 두 아이를 데리고 배에서 내렸다.

6.25동란으로 전쟁을 피해 남쪽을 찾은 그는 서귀포시의 한 언덕에서 피난생활을 시작한다.

아내 마사코(한국명 이남덕)와 5살.3살의 자식들과 함께 1년 동안 서귀포에 머문 그는 ‘서귀포의 환상’, ‘섶섬이 보이는 풍경’, ‘바닷가와 아이들’ 등의 작품을 완성시킨다.

이중섭! 그가 머물던 자리에 50년이 지난 2002년부터 서귀포시립이중섭미술관이 그를 대신해 자리하고 있다.

이중섭미술관의 입구에 들어서면 오른쪽에는 이중섭이 1951년 머물렀던 초가집과 텃밭 등이 그 당시 모습 그대로 위치해 있다.

초가집과 텃밭을 옆으로 하고 눈에 들어오는 이중섭미술관은 2층으로 이뤄진 원형의 박물관이다.

층마다 23평의 전시공간이 마련돼 있는 미술관은 총 122점의 작품이 전시돼 있는데 이중 이중섭 작품의 원화는 그림 6점과 편지 4개 등 총 10점이다.

1층 상설전시실에는 이중섭의 예술과 삶을 살펴볼 수 있는 작품과 연표등이 상설 전시돼 있다.

2층 기획전시실은   대관 전시공간으로 평상시는 이중섭과 친구들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이중섭 친구들을 보면 권옥연, 김병기, 김영주, 김환기, 박수근, 남관, 박고석, 도상봉, 이종우, 김흥수, 문학진, 백남준 등.

미술관의 한 관계자는 “한달 평균 200여명의 사람들이 이중섭의 작품을 보기 위해 방문한다”며 “특히 이회장, 신기남 등 정치인과 탤런트 나문희 등이 가족들과 함께 이 곳을 찾은 곳이 기억에 남는다”고 설명했다.

단체 손님보다 가족 손님이 많은 곳 이중섭미술관. 가족손님이 많은 이유는 미술관뿐만 아니라 이중섭이 머물렀던 초가집이 가정적인 모습으로 아직까지 1950년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중섭이 머물렀던 초가집에는 그 당시 주인이었던 김순복 할머니(85.서귀포시 서귀동)가 딸과 함께 찾아오는 사람들을 반기고 있다.

할머니는 그 당시의 일을 회상하면서 이중섭 화가에 대한 이야기를 털어놨다.

할머니는 이중섭에 대해 “그 양반은 밭일은 전혀 할줄 몰랐지. 다만 순하고 좋은 사람이였다”고 회상했다.

특히 “네식구는 바다에 가서 게잡는 것을 좋아했다”며 “그림을 그릴 때는 동네 꼬마들이 그의 등 뒤에서 구경하기 바빴다”고 말했다. 또 “이중섭의 아내 마사코는 그 당시 31살 동갑내기여서 서로 잘 통했다”고 한다.

이중섭미술관에서 자원봉사를 하고 있는 강치균(62.서귀포시 정방동) 문화유산해설가는 “내가 초등학교 2학년 때 이중섭씨가 그림 그릴 때마다 뒤에서 구경했다”며 그 당시에는 그림 그리는 모습도 신기했다고 한다.

한편 서귀포시는 전국에서 최초로 화가 이름을 거리명으로 명명한 이중섭문화의 거리와 복원된 이중섭거주지, 이중섭미술관을 연계해 지방문화예술을 진흥코자 매년 9~10월 약 7일간 이중섭거리에서 예술제를 개최하고 있다.

이 예술제는 학생 미술실기대회, 설치미술, 풍물놀이 등 관광객과 시민들이 함께 할 수 있는 다양한 문화 프로그램을 선보이고 있다.

 

이중섭이 일본여자 마사코(이남덕)을 사랑하게 되기까지는 갈등과 번민이 매우 컸다고 한다. 이중섭과 마사코, 조선인과 일본인이 결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1941년 이중섭이 마사코에게 보낸 엽서 그림 중에는 외딴 섬에서 이중섭은 나무가 되고 마사코는 흰 대리석이 돼 영원히 함께 하는 모습이 있다.

이 그림을 그린 지 꼭 10년이 지나 1951년, 이중섭과 마사코는 두 아들을 데리고 서귀포로 오게 된다.
‘섶섬이 보이는 풍경’은 서귀포에 안착한 후 그린 유화작품이다.

멀리 바다를 배경으로 왼쪽 근경에는 팽나무 두 그루가 서 있고 그 오른쪽으로는 돌담과 초가집이 낮게 자리를 잡았다. 담 너머 풍경에는 이웃집 지붕과 눌, 우영팥(텃밭)과 녹색 하귤나무가 보인다.

마당에 보이는 점경인물과 바다에 뜬 흰 돛단배, 아직 새잎이 돋아나지 않은 팽나무가 봄을 기다리고 있다. 팽나무의 휘어진 가지의 모양이 10년전 엽서그림과 닮은 것은 우연일까.

 

이중섭은 가장 한국적인 작가인 동시에 가장 현대적인 작가로 평가받는 화가이다.

이중섭은 평양에서 태어나 오산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 일본도쿄문화학원 미술과 재학중, 1937년 일본의 자유 미협전에 출품해 각광을 받고 1945년 귀국해 원산사범학교 교사로 재직했다.

1952년 부인이 두 아들과 함께 일본으로 가자, 그는 전국을 떠돌며 부두노동 등을 하다가 전쟁이 끝나자 서울로 올라와 1955년 미도파화랑에서 단 한번 개인전을 열었다. 그러나 계속된 생활고와 가족들과의 생이별을 견디지 못하고 1956년 적십자병원에서 40세의 나이로 쓸쓸히 숨졌다.

그의 작품은 야수파적인 강렬한 색감과 선묘 위주의 독특한 조형 등 서구적인 표현이지만, 향토적인 숨소리와 꿈을 표현해 한국적이면서도 웅장하고 무한한 세계를 내포하고 있다.

그의 작품의 소재로 주로 소, 닭, 어린이, 가족 등 일상성을 띠고 있으면서 시정이 넘치는 것들이다.
‘소’,‘흰소’,‘투계’,‘집 떠나는 가족’, 그리고 담뱃갑 속의 은지에 눌러 그린 수많은 은지화들이 대표작들로 남아 있다.

그의 예술세계를 이루는 기반은 철저하게 자신의 삶으로부터 연유하고 있다. 생활고 속에서 처자마저 일본에 보내고 전국을 떠돌며 외롭게 제작한 고통의 산물들이었던 그의 작품은, 1970년대 이르러서 새롭게 조명과 재평가를 받게 된다. 생전의 많은 인간적인 에피소드와 강한 개성이 담긴 작품들로 인해 그의 삶과 예술은 이제 대중적으로 거의 신화적인 명성을 얻고 있다.

 

 

 

이중섭과 서귀포

 

1.4후퇴 때 원산을 떠난 이중섭과 그 가족은 잠시 부산에 머문 후 서귀포에 도착한다. 서귀포는 이중섭에게 대단히 주요한 시공간으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길 떠나는 가족’이라는 작품 속에 따뜻한 남쪽 나라로 떠나는 이중섭 가족의 모습이 기록돼 있다.
소달구지 위에 여인과 두 아이가 꽃을 뿌리고 비둘기를 날리며 앞에서 소릴 모는 남정네는 감격에 겨워 고개를 제끼고 하늘을 향하고 있다.

하늘에는 한 가닥 구름이 서기처럼 그려져 있다. 소를 모는 남정네는 작가 자신이고 소달구지 위에 있는 여인과 두 아이는 부인과 두 아들임을 말할 나위도 없다.

가족이라는 모티브는 이중섭의 작품 속에 자주 등장한다. 그렇긴 하지만 이처럼 가족의 흥겨운 한 순간을 포착한 작품은 ‘길 떠나는 가족’외에 따로 없다. 길을 떠난다는 것은 잠깐 어디를 향해 가는 경우도 있지만 이중섭의 ‘길 떠나는 가족’은 거처를 옮기는 이주를 나타낸다.

정든 고향을 버리고 가는 슬픈 이주가 태반이지만 이중섭의 ‘길 떠나는 가족’은 즐거운 소풍놀이라도 가듯 흥에 겨운 이주로 묘사돼 있다.

그것은 자신들이 향해가고 있는 곳이 다름 아닌 지상의 낙원으로서의 따뜻한 남쪽 나라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서귀포는 이중섭에게 있어 지상의 유토피아로서의 공간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미술평론가 오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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