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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리식토기는 왜 육지엔 없고 아무르강 일대엔 있을까”
“고산리식토기는 왜 육지엔 없고 아무르강 일대엔 있을까”
  • 김형훈 기자
  • 승인 2012.10.13 11:45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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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역사 30選] <15>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고산리식토기’

고산리식토기 조각들.
역사를 배우는 청소년들에겐 고산이라는 두 글자는 그다지 낯설지 않다. 역사 교과서엔 고산리 유적이 우리나라에서는 가장 오래된 신석기 유적으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고산리 선사유적은 지난 1987년 고산리 주민에 의해 타제석창 등이 발견돼 제주대박물관에 신고하면서 처음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이후 지표조사를 거쳤고 본격적인 발굴조사는 1994년 이뤄진다. 당시 신창리와 무릉리를 잇는 해안도로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도로에 편입되는 확장구역에 한해 발굴조사가 진행됐고, 여기에서 귀중한 토기가 발견된다.

여기에서 나온 토기는 제주도 이외에서는 어디에서도 볼 수 없다는 점에 눈길이 간다. 하지만 1994년 발굴조사에서 나온 토기를 말하기 전에 고산리 선사유적의 중요성을 우선 언급해야겠다.

고산리 선사유적은 1994년부터 이뤄진 발굴과정을 거치면서 지난 1998년 국가사적 제412호로 지정·보호되고 있다. 고산리 선사유적이 국가사적으로 됐다는 건 그만큼 보존 가치가 높다는 걸 증명한다. 고산리 선사유적엔 가장 오래됐다는 의미의 최고(最古)’가 따라붙기 때문이다.

국가사적인 고산리 선사유적의 체계적 보존을 위해 제주시는 종합기본계획을 수립하고, 후속조치로 재단법인 제주문화유산연구원에 발굴조사를 의뢰하게 된다. 최근 제주문화유산연구원은 1차 발굴조사를 마치고, 두 차례의 자문회의와 최종보고회를 가졌다. 최종보고회 결과, 고산리 선사유적지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마을임이 입증됐다. 자문위원들은 우리나라 신석기 유적 가운데 가장 빠른 시기로서, 이렇게 많은 유구가 나올 줄은 몰랐다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고산리 선사유적에서는 유구와 유물이 숱하게 나왔다. 우리나라에 살던 신석기 초기 사람들이 이동생활이 아닌, 정주생활을 했다는 점이 확인된 것은 커다란 수확이다. 다량으로 발굴된 집터들이 이를 말해준다.

조각을 붙여 복원한 고산리식토기
여기에서 함께 나온 유물 가운데 토기를 빼놓을 수 없다. 토기도 여러 종류가 있으나 가장 빠른 단계의 토기에 주목을 할 필요가 있다. 가장 빠른 단계의 토기는 앞서 얘기했듯이 1994년 발굴조사에서 세상에 등장한다. 여태껏 대한민국 어느 땅에서도 나온 예가 없는 토기였기 때문이다. 이 토기는 고산에서 나왔다고 해서 고산리식이라는 이름이 붙기 시작했다. 한국고고학사전고산리식토기라는 이름이 정식으로 등재된 건 2006년부터이다.

제주도에서 나온 신석기 유물 가운데 지역 이름을 따서 고유명사가 된 건 고산리식토기가 유일하다. 그만큼 고산리식토기는 특징적이다.

고산리식토기는 일반적인 토기를 만드는 방법과는 다르다. 일반적인 토기는 태토에 모래 등을 섞어 만들지만 고산리식은 짚이나 풀 등의 보강재를 사용했다. 고산리식토기의 표면에 이런 흔적이 남겨져 있다. 고산리식토기는 흙에 짚이나 풀 등을 섞어 만든 뒤 600도 가량의 온도에서 구워진다. 이 때 짚이나 풀은 타서 사라지고 토기 표면에 보강재를 넣었던 흔적만 남게 된다.

고산리식토기 표면. 풀 등을 섞어 만든 흔적이 또렷이 보인다. 사진 속에 파인 부분이 토기를 구우면서 없어진 풀 등의 보강재 흔적이다.
토기는 사람들이 한 곳에 정착해서 살기 시작하면서 만들어졌고, 음식물을 보관하는 용도로 쓰이게 됐다. 고산리식토기는 이처럼 정주생활을 하게 된 인간들이 만든 토기발생기의 작품이다. 토기의 가장 원초적인 형태로 고토기’(古土器)로도 불린다.

그런데 고산리식토기를 닮은 고토기는 대한민국 어디에서도 발굴이 되지 않고 있다. 1994년 고산리식토기가 나온 지 20년이 다 되지만 고산리식토기가 나오는 곳은 국내에서는 제주도가 유일하다. 고산리식토기는 고산리에서 발굴된 것을 시작으로, 제주도 전역에서 발굴이 되고 있다. 따라서 고산리에 거주하던 이들이 제주도 전역을 돌면서 활동한 사실을 읽을 수 있다.

해외로 눈을 돌려보면 시베리아 아무르강 일대와 일본에서 고토기형태의 토기들이 나온다. 아무르강 하류 지역의 가샤유적을 비롯해 아무르강 중·하류 지역에서 풀 등의 보강재를 사용한 고산리식 형태의 토기들이 나오고 있다. 일본에서는 죠몽 유적 등에서 고토기 형태의 토기가 나오지만 고산리식이나 아무르강 일대에서 발굴된 토기와 달리 동물의 털을 보강재로 썼다.

여기에서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고산리식토기는 국내 어디에도 없는데, 머나먼 아무르강 유적의 토기와 만드는 수법이 같을까. 일부 학자들은 아무르강에 거주하던 이들이 황해를 따라 건너왔을 것이라고 한다. 당시 해수면은 지금보다 60m 가량 낮아 지금과 달리 바다쪽으로 더 뻗어 있었으며, 지금의 황해는 널따란 초원지대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 초원지대를 따라 오던 일행들이 제주도로 들어와서 고산리식토기를 퍼뜨렸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래도 의문은 풀리지 않는다. 왜 대한민국의 서해안이나 남해안에는 고산리식토기가 나오지 않는가라는 점이다.

고산리식토기는 제주 전역에 걸쳐 분포하고 있다. 하지만 육지부에서는 발견이 되지 않고 있다.
문화는 상호의존을 통해 발전한다. 그렇다고 전파를 통해서만 문화가 이뤄지는 건 아니다. 한 지역의 문화는 그 지역에서 자생하기도 한다.

가설이지만 제주도의 토양 자체가 토기를 만들기에는 적합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고산리에 정착한 선인들이 저장용도로 그릇을 만들려다가 점성이 약한 흙을 단단하게 이어붙이기 위해 풀을 섞어 그릇을 만들어낸 건 아닐까. 아무르강 일대의 사람들도, 일본에 거주한 이들도 토기를 쉽게 만들려고 보강재를 넣었을 것이다.

이쯤에서 토기를 만드는 기술을 누군가가 전해준 전파론이 아닌, 각 지역별로 토기를 만드는 기술이 발생한 다원론으로 접근하는 시도가 필요하다. 그렇다면 제주도 이외의 지역에서는 왜 나오지 않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어떻게 답해야 할까. 한반도에 거주했던 이들은 그런 작업을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아직도 땅 속에서 발굴을 기다리는 고산리식토기가 육지부에 있을 수도 있다. 그에 대한 답은 학자들에게 맡긴다.

<김형훈 기자 / 저작권자 미디어제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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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eisson 2012-10-24 16:22:32
An answer from an expert! Thanks for cotnribtiu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