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터리. 어떤 사건을 두고 이해하지 못할 때 흔히 ‘미스터리’라고 부른다. 그런 사건은 많지만 역사에서만큼 미스터리 한 일이 많을까. 역사를 뒤지면 그야말로 ‘미스터리’라고 부를 사건들이 널려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제주도라는 땅. 예전에 탐라라고 불리던 곳도 미스터리다. 고·양·부 3성이 주장하듯 단군왕검보다 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를 비롯, 과연 탐라는 강력한 국가라고 부를만한 정치체였는지도 의문이다. 더욱이 역사는 유물과 사료라는 역사적인 자료로서 말을 해야 하는데 탐라는 그런 걸 찾기 힘들다. 청동기와 철기라고 말할 유물도 거의 없다. 그야말로 탐라라는 자체가 미스터리이다.
탐라와 백제와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역사서는 백제 동성왕(재위 479~501) 이후로 탐라가 백제에 복속됐다고 돼 있지만 그게 사실일까. ‘제주역사 30선’은 마지막 기사로 탐라가 백제의 속국이었는지를 짚어보고 마무리를 하고자 한다.
탐라가 백제의 속국이었다는 주장은 <삼국사기> ‘백제본기’를 참고로 하고 있다. 탐라와 백제의 관계를 보여주는 첫 사례는 문주왕(재위 475~477) 때 등장한다. 바로 문주왕 2년(476)이다. 당시 기사는 ‘탐라국에서 토산물을 바치자 왕이 기뻐해 은솔로 삼았다’고 돼 있다. 토산물, 이 기사에서는 ‘방물(方物)’로 나온다. ‘방물’을 바쳤다는 건 세금의 성격이 아니어서 지배를 받는 관계는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또다른 기사는 동성왕 20년(498)에 등장한다.
“8월에 왕이 탐라에서 세금을 바치지 않자 친히 정벌하려고 무진주에 이르렀다. 탐라가 이를 듣고 사신을 보내 죄를 빌므로 그만뒀다. 이 때 탐라는 탐모라다. (八月 王以耽羅不修貢賦 親征至武珍州 耽羅聞之 遣使乞罪 乃止 耽羅卽耽牟羅)”
문주왕 기록과 동성왕 기록은 20년의 간극이 있다. 그 간극만큼이나 표현도 다르다. ‘방물’과 ‘공부(貢賦)’이다. 방물은 앞서 토산물을 얘기하는 것이기에 지배관계는 설정이 되지 않는다. ‘공부’는 다르다. 공부는 세금을 거둬들이는 것이어서 어느 정도 지배관계 설정이 가능하다. 기록으로만 본다면 20년 사이에 탐라는 백제에 복속되는 관계로 바뀌었음을 알게 된다.
그러나 두 기사의 문제는, 탐라가 지금의 제주도를 일컫는 것인가에 있다. 또한 더 중요한 건 당시 백제가 전라남도 지역을 완전 장악하고 있었는지에 있다.
기록에 등장하는 문주왕과 동성왕은 비운의 주인공들이다. 고대의 왕은 강력한 왕권을 지니지 못해 신하로부터 죽임을 당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문주왕과 동성왕이 그런 경우이다.
문주왕은 개로왕(재위 455~475)에 이어 왕위에 오른다. 그는 한성에서 왕위에 오르지만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자신의 아버지인 개로왕은 고구려군에 끌려가 참수를 당하고, 문주왕은 왕위에 오르자 곧바로 웅진으로 수도를 옮긴다. 그러나 문주왕은 왕노릇을 제대로 해보지도 못하고 2년만에 신하인 해구에게 죽임을 당한다.
동성왕은 문주왕 동생의 아들이다. 담력이 있고 활솜씨는 백발백중이었다고 <삼국사기>는 전한다. 그는 빈번한 토목공사 등으로 민심을 잃고, 지방세력에 대한 지나친 통제로 귀족들과 갈등을 겪는다. 결국 동성왕도 신하인 백가의 손에 죽는다.
이 두 왕의 관계에 등장하는 탐라. 문주왕 때 탐라가 토산물을 바칠 수 있는 관계였을까. 문주왕은 다른 나라에 눈을 돌릴만한 여유가 없었다. 고구려의 위협에 방어하기에 급급한 시절인데, 먼 바다를 건너서 탐라와 관계를 논할 단계는 되질 못했다.
그렇다면 기록에 등장하는 탐라는 제주도가 아니란 말인가. 오히려 그럴 가능성이 높다. 백제는 강력한 왕권을 지녔던 근초고왕(재위 346∼375) 때 마한을 복속하고 위세를 떨쳤다고 돼 있지만 실제로는 전라남도 지역을 지배하지 못했다. 나주 반남고분군 등을 보면 상당히 강력한 마한의 세력이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실제 백제의 전남 지배는 동성왕 시기 이후로 볼 수 있다.
동성왕 20년에 등장한 기록을 잘 들여다보면 문제가 해결된다. 탐라 문제도 해결될 수 있다. ‘탐라는 곧 탐모라(耽羅卽耽牟羅)’라는 기록이 있다. 기록은 지금의 광주인 무진주에 동성왕이 군대를 끌고 도착하자, 탐라가 죄를 빌었다는 내용이다. 특히 주를 달아서 탐라를 ‘탐모라’라고 강조를 하고 있다. 주를 달 정도면 바다 건너 탐라와 헷갈리지 말라는 것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전라남도 일대와 제주도를 포함해 광역 개념으로 탐라라고 불렀을 수도 있다. 때문에 이 때 탐라는 현재 강진 등을 포함한 전남 남해안 일대를 설명한다고 이해할 수 있다.
한번 더 동성왕 20년 기록을 음미하자. 동성왕 때 들면서 전남 일대의 마한 세력을 복속시켰는데 세금을 제때 내지 않자 왕이 직접 정벌에 나선다. 광주 일대에 달하자 위협을 느낀 마한 잔존 세력이 무릎을 꿇었다면 해석에 문제될 게 없다.
이렇게 들여다보면 문주왕의 기록에 등장하는 탐라 역시 전남 남해안 일대로 판단하면 이해가 가능해진다.
그렇다면 가장 중요한 걸 짚어보겠다. 과연 백제가 탐라를 복속했는가의 문제이다. 동성왕 때의 기록은 탐라가 백제에 복속된 게 아니라, 마한의 잔존 세력들이 백제에 복속됐다고 해석하면 되고, 실제 제주도는 언제 복속됐느냐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를 살펴보자. 문무왕(626~681) 때 기록이다. 문무왕 2년(627)의 기록은 다음처럼 써 있다.
“탐라국 주인인 좌평 도동음률이 항복했다. 탐라는 무덕 이래로 백제의 신하였다. 때문에 좌평을 관호로 삼았다. 신라에 항복해서 속국이 됐다. (耽羅國主佐平徒冬音律 來降 耽羅自武德以來臣屬百濟 故以佐平爲官號 至是降爲屬國)”
신라본기에 등장하는 탐라는 제주도를 말하는 걸까, 탐모라일까. 7세기의 기록인만큼 이 때의 탐라는 제주도로 보면 무리가 없다.
무덕은 당나라 첫 연호로 서기 618년부터 사용됐다. 신라본기의 기록이 맞다면 백제에 복속된 시기는 10년에 불과한 셈이 된다.
만일 제주도, 아니 탐라로 불리던 세력이 바다 건너 백제의 속국이 됐다면 제주도 땅에서 백제 관련 유물이 대거 나와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게 이상할 따름이다. 백제의 대표적인 유물로는 직구단경호와 고배 등이 있으나 제주에서는 발견이 되지 않았다. 대신 마한 세력의 유물은 대거 나오고 있다. 마한토기로 분류되는 이중구연호, 조족문토기, 평구원저단구호 등이 발굴됐다.
어느 세력이 서로 다른 세력을 아우른다면 문화유입은 있어야 한다. 결론은 백제의 문화유입은 없고, 신라의 유물들은 제주에서 발굴이 된다는 점은 뭘까. 답은 자명하다. 탐라는 백제의 속국이 아니었다. 아울러 문주왕과 동성왕 때 사료에 등장하는 탐라는 지금의 제주도를 말하는 게 아니다. >>끝<<
<김형훈 기자 / 저작권자 ⓒ 미디어제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