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04-26 18:24 (금)
“성산일출봉과 산방산을 유독 크게 그린 이유는 뭘까”
“성산일출봉과 산방산을 유독 크게 그린 이유는 뭘까”
  • 김형훈 기자
  • 승인 2015.08.16 08:34
  • 댓글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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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라순력도 다시보기] <3> 제주도 전체를 그린 ‘한라장촉’
<탐라순력지>에 실려 있는 '한라장촉'

앞서 이형상 목사가 어떤 인물인지를 들여다봤다. 그는 우리가 조선 역사를 통해 익히 알고 있는 이들과의 친분이 많은 인물이다. 자화상으로 유명한 윤두서는 이형상의 사돈이다. 윤두서는 다산 정약용의 외증조부라는 사실도 앞서 밝혔다. 이형상은 정약용에는 비할 바는 되지 않지만 300여권을 넘는 많은 저서를 남기기도 했다.

이형상 목사가 살던 시대는 조선 역시 외래 문물을 많이 접한 때였다. 비록 조선은 다른 나라에 문화를 열어주지는 않았으나 사대부를 중심으로는 새로운 문물에 대한 욕구가 매우 높았다는 사실을 역사는 말한다.

<탐라순력도>는 그런 단면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탐라순력도>를 넘기면 가장 먼저 마주하는 건 제주도 전체를 그린 지도이다. ‘한라장촉(漢拏壯矚)’이라는 제목이 달렸다. ‘한라장촉’이라는 제목에서 제주도를 뚫어지게, 그러니까 아주 자세하게 표현을 했다는 의도를 엿보게 된다.

조선은 초기부터 지리지와 지도 제작에 심혈을 기울인 나라였다. 조선을 건국한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영토의 개념으로서, 직접 임금이 관리하는 강역으로서 지도의 필요성은 매우 컸다.

특히 제주도는 그 가치가 매우 높았다. 조선시대에 본격적인 유배지로서의 기능을 하면서 제주도라는 섬의 중요성은 더 클 수밖에 없었다. 1482년(성종 13)에 양성지가 ‘제주삼읍도’를 그려 올렸다는 기록이 있다. 양성지는 <고려사> 가운데 지리지 편찬을 담당했던 주역이기에 ‘제주삼읍도’를 비롯한 많은 지도가 만들어졌음을 알게 된다.

조선은 초기부터 지도에 심혈을 기울였지만 지금 남아서 전해지는 지도 대부분은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것들이다.

‘한라장촉’은 1702년 그려진 지도이다. 그렇다면 이형상은 지도에 어느 정도 관심이 있었을까. 그의 저서를 들여다보면, 이형상은 지리에 대한 풍부한 식견이 있던 인물이다. 그는 <몽고국지>, <일본국지>, <강도지>, <남환박물> 등 지리와 관련된 저술을 꽤 펴냈다. 이 가운데 <강도지>는 경기도 강화지역의 지리지로, 제주목사로 내려오기 전에 펴낸 저술이다.

또한 이형상 목사는 중국에 온 서양선교사인 마테오리치가 제작한 ‘곤여만국전도’를 제주목사로 부임하기 전에 본 경험이 있기에 그런 경험도 ‘한라장촉’을 그리는데 포함됐다.

이제부터 ‘한라장촉’의 의미 그대로 뚫어지게 들여다보자. 이 지도를 본 이들은 보는 순간 헷갈린다. ‘왜 지도가 거꾸로지?’라는 생각을 품게 된다. 제주시 지역이 아래 쪽에, 위쪽이 서귀포 지역이기 때문이다. 대게의 지도는 북쪽이 위쪽으로 향하지만 이 지도는 남쪽이 위로 향하고 있다. 너무 깊게 고민할 필요는 없다. 단독으로 그려진 지도는 제주도 입장에서 보는 게 아니라, 서울에서 제주도를 바라본 방향으로 그렸기에 뒤집힌 것이다. 한양에 있는 임금이 바라보는 방향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한라장촉’은 제주도 주위를 원 그리듯 돌며 24방위를 표시하고 있다. 정북 방향은 ‘자(子)’로 표현을 해뒀다. 정남은 ‘오(午)’라고 하는 등 12간지를 표시했다. 12간지(자·축·인·묘·진·사·오·미·신·유·술·해) 사이사이엔 팔괘 가운데 4괘(건·곤·손·간)와 10간(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을 써놓았다.

이 지도를 보면 남해안의 주요 지역이 보인다. ‘건(乾)’시 방향, 즉 북서쪽에 흑산도가 보인다. 북쪽에서 약간 동쪽에 해당하는 ‘축(丑)’시 방향엔 완도가 눈에 들어온다.

‘한라장촉’은 남해안만 표기한 지도가 아니다. 제주도를 둘러싼 주변 각국을 표시했다. 일본과 중국, 멀리는 오키나와도 보인다.

남서쪽에 해당하는 ‘갑(甲)’시 방향엔 중국의 소주와 항주를 표시했다. 정남 방향엔 지금의 오키나와를 말하는 유구(琉球)를 표시했다. 일본은 남동쪽인 ‘진(辰)’시 방향에, 아주 멀리 있는 안남국(지금의 베트남)과 섬라국(지금의 태국)도 이 지도에 등장한다.

'한라장촉'은 3읍의 경계를 붉은 실선으로 해두고 있다. 파란색 원 안에 대정과 제주가 표시돼 있으며, 그 사이에 붉은 실선이 그어진 것을 볼 수 있다.

당시 제주도는 제주목과 정의현·대정현 등 3개 지역으로 구분돼 있었다. ‘한라장촉’은 붉은 실선(자세하게 들여다봐야 보임)으로 경계를 표시하고 있다. 제주목과 대정현의 경계는 지금의 한경면 판포 일대, 제주목과 정의현 경계는 하도해수욕장 일대를, 대정현과 정의현의 경계는 지금의 강정동 앞에 있는 썩은섬 일대로 삼고 있다. 3개의 고을과 9진을 포함한 12곳의 지역은 붉은 색채를 해뒀다.

지도 중간중간에 오름도 표기돼 있다. 성산일출봉인 경우 ‘성산(城山)’이라는 이름으로 유별나게 크게 그려져 있다. 산방산도 ‘산방산(山房)’으로 성산일출봉만큼이나 크다.

성산일출봉을 다른 것에 비해 유독 크게 그려뒀다.

당시 제주도는 말을 키우는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한라장촉’은 중산간 지대에 설치돼 있던 목마장도 잘 표기를 해두고 있다. 점으로 찍어서 돌담 경계를 자세하게 표현했다.

지도의 밑에는 임오년(1702년) 4월 15일에 제작했음을 명기하고 있다. 또한 제주도의 크기도 표시를 했는데, 제주도의 전체 둘레는 480리이며 동서길이는 170리, 남북길이는 73리로 써두고 있다. 각 나라와의 거리도 표시를 했는데 일본국까지는 2000여리, 중국 항주까지는 7000리라고 명기했다.

이 지도는 모든 걸 한 눈에 바라보도록 정보를 담은 특징이 있다. 어떤 것은 과장되게 표현하고, 실제 거리도 맞지 않지만 당시에는 보기 드문 정보를 제공한 지도였음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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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예동 2015-08-17 17:35:34
앞서 '산성(山城)'을 '성산'으로 읽었다면 ‘방산(房山)’도 '산방'으로 읽어야 바른 해석이 아닐까요? 어느 해석이 옳은 것인지요? 그리고 『남환박물』 「지지」에 의하면. ‘성산(城山)·산방(山房)·송악(松岳)은 바다 속에서 우뚝 솟았다[城山山房松岳之斗起海中]’라는 내용을 바탕으로 하여 크게 표시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따라서 ‘산방’ 옆에 있는 ‘송악’의 내용도 소개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으로 보입니다.

강창룡 2015-08-17 17:29:55
앞서 '산성(山城)'을 '성산'으로 읽었다면 ‘방산(房山)’도 '산방'으로 읽어야 바른 해석이 아닐까요? 어느 해석이 옳은 것인지요? 그리고 『남환박물』 「지지」에 의하면. ‘성산(城山)·산방(山房)·송악(松岳)은 바다 속에서 우뚝 솟았다[城山山房松岳之斗起海中]’라는 내용을 바탕으로 하여 크게 표시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따라서 ‘산방’ 옆에 있는 ‘송악’의 내용도 소개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으로 보입니다.

김형훈 2015-08-17 16:44:32
상예동님의 지적이 맞습니다. '방산'이라고 쓴 것은 독자들이 '산방산'을 말하는구나라고 이해를 구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지적 감사합니다.

상예동 2015-08-17 15:53:37
앞서 '산성(山城)'을 '성산'으로 읽었다면 ‘방산(房山)’도 '산방'으로 읽어야 바른 해석이 아닐까요? 어느 해석이 옳은 것인지요? 그리고 『남환박물』 「지지」에 의하면. ‘성산(城山)·산방(山房)·송악(松岳)은 바다 곳에서 우뚝 솟았다[城山山房松岳之斗起海中]’라는 내용을 바탕으로 하여 크게 표시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따라서 ‘산방’ 옆에 있는 ‘송악’의 내용도 소개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으로 보입니다.

상예동 2015-08-17 15:11:01
앞서 '산성(山城)'을 '성산'으로 읽었다면 ‘방산(房山)’도 '산방'으로 읽어야 바른 해석이 아닐까요? 어느 해석이 바른 것인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