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는 유배의 섬으로 알려져 있다. 제주가 유배의 섬이 된 건 몽골의 지배를 거치면서부터이다. 제주도는 원나라의 왕족 등의 유배지였다가 본격적으로 조선의 중앙집권체제에 들어가면서 유배인들이 들어온다.
이들 유배인들이나 조선조 관리들이 들어오는 경로는 다양했다. 제주시에 있는 화북, 조천, 애월, 도두 등이 선택을 받았다. 이 가운데 제주성과 가장 가까운 곳은 화북이었다. 하지만 화북 바다는 녹록치 않았다. 17세기 중반인 1653년 이원진 목사가 쓴 <탐라지>의 기록을 들여다보면 화북포구를 진입하는데 어려움이 많았다는 걸 알 수 있다. <탐라지>엔 “이곳은 바윗돌이 험악하고 태풍이 많아 판옥선 운용이 쉽지 않다”고 돼 있다.
그럼에도 이형상 목사의 <탐라순력도>에 나오는 ‘화북성조(禾北城操)’는 순력의 첫 발걸음을 디딘 장소였다. 이형상 목사가 순력을 감행한 때는 1702년 10월 29일이다. 화북성을 시작으로, 동쪽으로 일주를 하게 된다.
‘화북성조’는 화북성에 가서 군사를 조련했다는 뜻이 된다. 당시는 화북진성이었고, 군사들이 어떤 자세로 활동을 하고 있는지를 점검한 것이다. 이형상 목사가 첫 순력을 하는 시점이었기에 아마도 군기가 바짝 들었을 건 분명하다.
그러나 이형상 목사의 순력을 살피기 전에 알아둘 게 있다. 앞서 이원진 목사의 <탐라지> 이야기를 꺼냈는데, <탐라순력도>에 등장하는 화북성은 이원진 목사 이후에 만들어졌다. 이원진 목사 때만하더라도 화북은 일개 수전소였다. 수전소는 지금으로 말하면 해군(당시는 수군)이 주둔하던 곳으로, 성곽을 만들어 진지를 구축하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1678년 화북진이 구축되고 성도 만들어진다. 성이 구축된 진(鎭)은 방호소로도 불렸다. 화북진성이 완전 구축되는 건 최관 목사 때이다. 특히한 점은 바로 바닷가와 인접해서 구축이 됐다.
화북진성이 만들어진 건 화북이 제주성과 가장 가까운 곳이었음에도 그동안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의미도 있었다. 화북에 진을 구축하고, 진성을 만듦으로써 제 역할을 하게 된다. 이후 화북을 통해 중앙관리의 유입은 물론, 유배인들도 오가게 된다. 화북을 거쳐간 유배인으로는 추사 김정희, 면암 최익현 등이 있다.
화북이 관문으로 역할이 중요해지면서 화북포구를 정비하는 일도 벌인다. 조선 영조 11년인 1735년, 김정 목사가 직접 돌을 나르며 포구 구축에 힘을 기울인다. 그러다 김정 목사는 화북에서 사망한다.
그러면 다시 <탐라순력도>의 ‘화북성조’로 돌아가 보겠다. ‘화북성조’를 보면 화북성이 있고, 서쪽(그림의 오른쪽)으로 포구가 형성돼 있음을 알게 된다. 이는 현재의 모습과는 다르다. 현재는 화북진성의 동쪽으로도 포구가 만들어져 있으나 여기 그림엔 동쪽 포구는 없다. 동쪽 포구는 일제강점기에 들어서 새로 구축된다.
‘화북성조’를 보면 마을 이름이 ‘별도포리(別刀浦里)’로 나와 있다. 화북을 ‘별도’라는 이름으로 부른 건 아주 오래이다. 고려 때부터 ‘별도’라는 이름이 등장한다. <탐라순력도> 3번째 이야기를 할 때 제주도 전체 지도를 그린 ‘한라장촉’ 이야기를 꺼냈다. ‘한라장촉’을 들여다보면 화북 지역의 포구 이름은 별도포로 돼 있고, 진성을 나타낸 그림엔 ‘화북’이라고 표기를 해두고 있다. <탐라순력도>에 등장하는 화북이라는 이름은 이형상 목사가 제주에 오기 50년전에 먼저 거쳐간 이원진 목사의 <탐라지>부터이다. 이후 ‘화북’과 ‘별도’는 섞여 쓰이게 된다.
화북성은 군사적인 중요성도 그렇지만, 중앙과의 교두보로서 중요한 위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럼 화북성에 어느 정도의 군사를 두고 있었을까. ‘화북성조’의 하단에 있는 글을 보면 알 수 있다. “성정군(城丁軍) 171명이 있다”고 써있다. 성정군은 성을 지키는 병력인 것은 분명하지만 정식 병력으로 보기는 힘들다. 성정군은 병력 동원에서 제외된 이들도 포함이 돼 있었기 때문이다.
‘화북성조’는 순력을 할 때 어떤 깃발을 사용하고 있는지도 알게 된다. 성의 동서남북 4개 방위에 커다란 깃발을 꽂아둔다. 다른 진성을 둘러볼 때도 마찬가지이다. 4곳의 방위에 걸어두는 깃발의 특징은 괘가 그려져 있다는 점이다. 성의 북쪽은 8괘 가운데 ‘감(坎)’을, 남쪽은 ‘리(離)’, 동쪽은 ‘진(震)’, 서쪽은 ‘태(兌)’를 그려넣었다. 방위를 표시하는 깃발의 색도 다 다르다. ‘감’은 흑색, ‘리’는 붉은색, ‘진’은 녹색, ‘태’는 하얀 바탕이다.
화북성은 동쪽과 서쪽에 각각 문이 있으며, 성의 서쪽에 ‘비각’이 눈에 들어온다. 비각이 어떤 의미인지는 알 수 없으나 위치상으로는 해신사로 보는 견해도 있다. 지금 해신사는 화북진성의 바로 곁에 자리를 틀고 있으나 지금의 위치는 옮겨진 것이기에, ‘화북성조’에 그려진 ‘비각’이 해신사일 수도 있다는 견해도 눈여겨봐야 할 것 같다.
<김형훈 기자 / 저작권자 ⓒ 미디어제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