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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 그리고 제주 이야기
“임진왜란 일어나기 전 조선 군인은 오합지졸이었다”
[탐라순력도 다시보기] <25> 임진왜란 전 조선
데스크승인 2017.04.15  06:29:25 김형훈 기자 | coffa@naver.com  

 

지난번 <탐라순력도>에 담긴 ‘교래대렵’을 소개했다. 이 그림을 통해 사냥이 지니는 가치와 조선 조정에서 사냥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해봤다. 그런데 ‘교래대렵’엔 총을 쏘는 이가 들어 있다. <탐라순력도>에 담긴 그림 41점 가운데 총을 표현한 건 ‘교래대렵’이 유일하다. ‘교래대렵’에 담긴 그림은 개인 화기로서의 총이다. 총이 많지는 않았겠지만 중요한 무기로서의 역할을 했음을 이 그림을 통해 알게 된다.

 

그렇다면 과연 조선시대 무기는 어땠을까. 조선시대 무기로는 총도 있고, 활도 있다. 무기는 특히 전쟁이라는 극한상황을 맞았을 때 업그레이드된다. 무기와 조선시대의 군사조직, 전쟁상황에서 어떻게 대처를 했고 무기는 어떻게 발전을 해왔는지 몇 차례 들여다보려 한다. 우선 이번 시간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까지의 조선 상황을 살펴보자. <탐라순력도>에 담긴 총 이야기를 하려면 군사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남성은 나라를 지킬 의무가 있다. 헌법 제39조는 ‘모든 국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국방의 의무를 진다’고 돼 있다. 별다른 이유가 없다면 대한민국 남성이라면 다 군대에 갔다 와야 한다. 그걸 ‘개병제’라고 부른다. 조선시대는 현재 ‘개병제’를 유지하는 대한민국과 달리 시대에 따라 차이가 있다.

 

조선 전기를 보자. 흔히 군사의 의무를 지는 일을 ‘군역(軍役)’이라고 부른다. 조선 초기는 양반을 제외한 양인은 누구든 군역을 져야 하는 ‘양인개병(良人皆兵)’이었다. 지금의 대한민국처럼 양인들은 개병제 대상이었다. 또한 이 시대 ‘양인개병’을 ‘병농일치(兵農一致)’라고 부르기도 한다. 병농일치는 농사를 짓는 농민, 즉 양인은 군사적인 일을 해야만 하는 상황임을 알게 된다. 병농일치를 내세우는 이유는 농민들을 군사로 활용할 경우 국가 재정에서 지출하는 식량 등의 문제점을 해소한다는 그런 의미도 내포돼 있다.

 

그런데 조선 당시의 군역은 직접 군복무를 하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직접 군 복무를 하는 이들은 정군(正軍)이라 부르고, 직접 군에 복무는 하지 않더라도 경제적 부담을 지는 형태가 있었다. 이걸 봉족(奉足)이라고 부른다. 봉족은 ‘보인(保人)’이라고도 하는데, <세종실록>을 들여다보면 “정정(正丁) 1명에 여분의 정(丁)을 두어 그로 하여금 경제적 지원을 해서 정군을 돕도록 한 걸 봉족이라고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정정(正丁)’은 직접 군역에 나가서 군사적 임무를 맡는 정군(正軍)이고, ‘여분의 정’은 바로 군사 복무는 하지 않지만 정군의 경제적 지원을 하는 사람을 말한다.

 

보인이 필요한 이유는 군 복무를 하는 집안의 살림살이 때문이었다. 당시엔 16세부터 60세까지 군역의 의무를 져야 했는데, 남성 장정이 실제 군 복무를 하게 되면 집안 살림이 어려워진다. 때문에 조선 초기엔 정군을 돕는 이들을 두게 하고, 보인이라고 불리는 이들이 군 복무를 하러 간 집안의 재정을 도와주게 됐다. 이때 경제적 지원의 형태는 당시 돈 역할을 했던 베, 즉 면포로 정했다. 보인이 납부한 베를 보포(保布)라고 불렀으며, 보인이 정군에게 면포를 주게 된다.

 

군 복무는 쉬운 일이 아니다. 지금 시대도 면제를 받으려고 애쓰는 이들이 많은데, 예전 농민에게 주어진 군 복무는 농민 그들에겐 엄청난 부담이었다. <조선왕조실록>에 이와 관련된 글이 많다.

 

“요즘 군적에 백성들을 많이 넣으려고 힘씁니다. 한 집에 부자나 형제가 있을 때 아버지가 정군이 되면, 아들은 봉족이 되고, 형이 정군이 되면 동생이 봉족이 됩니다. 이 뿐만 아니라 만약 남은 장정이 있으면 빼앗아 다른 부역을 지우고, 아무리 늙고 병들어서 찾아 모아서 남김없이 모두 군적에 넣습니다. 군사의 많음이 예전에 비해 두 갑절, 다섯 갑절 뿐이 아닙니다. 농민들은 때문에 병적에 들어가 있으니 군사와 농사가 함께 곤란합니다.”<성종실록 35권, 성종 4년 10월 2일 경신 2번째 기사>

 

<성종실록>에 담긴 위 내용은 대사관 정괄 등이 성종에게 올린 글이다. 군적을 만들면서 집안에 있는 남성을 죄다 집어넣는 경우에 적잖은 문제점이 있다는 설명이다.

 

정괄의 상소는 좀 제대로 된 정예군이 필요하다는 의미에서 군사제도의 문제점을 지적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당시엔 전쟁 시기가 아니었기에 정군이라고 하더라도 군사일을 보는 일보다 그렇지 않은 곳에 투입되기 일쑤였다. 보병으로 군역을 하는 이들이 서울에 와서 하는 군사 업무는 실제 군사업무가 아니었다. 허드렛일에 투입됐다. 정괄의 상소를 더 들어보자.

 

   
조선시대 성종 당시 군사 문제점을 지적한 글이다. 붉은선 안은 보병의 문제점을 설명하고 있다. 보병이 서울에서 와서 하는 일이라고는 토목 공사에 투입돼 사실상 하인 역할에 지나지 않고 있다는 지적이다.

“이른바 기병이라는 게 말을 타는 건 없고, 임금을 모시고 어디 갈 때나 남에게 말을 빌어서 준비를 합니다. 말을 구하지 못하면 걸어서 따라 갑니다. 군사들은 몸에 누더기를 입고 발에 짚신을 신어서 정돈되지도 않습니다. 보병이 서울에 오면 토목공사에 나섭니다. 이름은 군사이지만 이들은 하인입니다.”

 

정괄의 상소를 들어보면 그야말로 오합지졸 단계에 이르는 군사 상황을 보는 듯하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군사 업무를 보는 것도 아니고, 노역에 동원되는 상황이기에 사람을 대신 사서 군역을 맡게 하는 경우도 생겼다. 이처럼 사람을 대신해서 군역을 하는 걸 ‘대립제(代立制)’라고 하며, 베를 주고 사람을 산다는 의미로 ‘수포대립(收布代立)’이라고도 한다.

 

앞서 정군은 보인으로부터 베를 받게 되는데, 정군이 직접 군 복무를 하지 않고 보인으로부터 받은 베를 다른 사람에게 주고 군 복무를 때우는 일이 보편화되기 시작했다. 결국 중종 36년(1541) 군사 업무를 베로 내게 하는 ‘군적수포제’가 도입된다. 임진왜란이 일어나는 건 1592년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51년전, 조선에서 그나마 군사 기능을 담당했던 군역제는 베를 내는 일로 대체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전쟁을 치렀으니 어떻게 됐을까. 답이 나오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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