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구스투스황제의 치세기간인 기원 전 29년부터 기원 후 160년까지 약 200년 동안 로마에는 내란과 큰 전쟁이 없고 치안이 확립되어 고통과 생업이 안전하게 보호되는데 이 시기를 로마의 평화. 팍스 로마나(Pax Romana)로 부른다.
그런데 이 평화의 시기에 나사렛 예수와 초대 교회의 선교활동이 박해를 받게 된다.
당시 로마의 종교 정책은 그들의 지배 체제에 도전하지 않는 한 자유방임적이었다.
당시의 예수 운동이 세속적. 정치적. 외적 평화와 상관없는 전혀 다른 차원의 평화, 즉 영적이고 종교적인 내적인 평화만을 이야기하였다면 '팍스 로마나'에서 박해를 받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예수께서 평화는 '비전쟁 상태'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민족과 민족 사이, 인종과 인종사이, 남자와 여자 사이, 계급과 계급 사이의 차별과 억압이 없는 궁극적 평화를 의미한다.
이 평화는 몰 역사적이지 않고 반계급적이지 않으며 현실적이고 정치성까지를 내포하는 실제적인 평화이다.
제주 평화 학교의 추진위 중 신부님과 목사님이 계시니 성서의 평화 사상을 잘 알고 계실테지만 그래도 한 번 더 읽어 드린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는 유대사람과 이방사람 사이에 막혔던 담을 허시고 뜻을 하나로 만드시고 서로 원수 된 것을 자기 몸으로 해소시킨 분입니다. ....... 그를 통하여 이방사람과 유대사람 두 편이 함께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로 나아가게 된 것입니다."(에베소서2:14,18)
차별과 억압의 철폐가 평화의 시작이며, 그것을 용인하고 그것과 양립할 수 있는 것은 진정한 평화가 아니다.
이러한 차별의 현실을 인정하거나 고수하려는 사람은 어떠한 이념을 붙이든 간에 반평화적이다.
이러한 평화의 개념에서 평화학교를 설립한다면 그 과정 또한 평화스러워야 한다.
#논란과 우려
전쟁의 반대개념으로서의 평화만을 생각하는 우리의 좁은 사고에서 적극적인 평화사상을 현실적인 평화교육으로 끌어들이려는 평화학교의 설립취지는 공감하지만 그것이 6. 25 기념식날 그리기 대회의 아이들 그림처럼 '철조망 위의 비둘기'가 평화 이미지의 다인 것처럼 단순화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1년 수업료 440만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 해도 경제적으로 이미 학생을 '차별'해서 받게 된다는 부정적 평가는 이미 평화학교의 설립 취지를 무색케 만드는 것으로 심각한 것이다.
그리고 '화해의 직분'을 감당해야 될 추진위의 인사들에 대한 '명망가' 등의 비판은 환경운동단체의 장이 의료원 수장이 되는 제주 시민운동의 정서적 혼란에서 예민해진 비판이라 해도 충분히 귀를 기울여야 할 대목이다.
혹시 시민운동이 권력화되거나, 그것의 힘을 발휘해 평화학교를 추진하는데 도움을 받고 있다면 '제주평화학교'라는 이름 대신 명문사립학교의 취지로 대체되어야 할 것이다.
여기에 교육예산 지원의 비판이 일자 기업 모금등의 예산확보 방안이 나오는 대목에서는 '평화 교육'이 목적이 아니라 '학교와 이사자리'가 진짜 목적이 아닌가하는 의구심까지 든다.
# 도민의 목소리에 눈과 귀를 열어야
"네가 오늘이라도 평화에 이르게 하는 일을 알았더라면 좋았을터인데, 그러나 지금 그것이 네 눈데 가리워져 있구나"(누가복음19:42)는 말씀처럼 평화학교를 준비하는 인사들의 눈과 귀가 열리기를 바란다.
<상명에서 장금항 목사>
#외부원고인 '미디어칼럼'은 미디어제주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언론으로부터 시민단체는 크게 옹호받았지만 앞으로도 그럴까요
여성특보가고 제주의료원장 가고
그러면서 선거때면 공명선거 외치고
이런 시민운동 시민들이 호응할까요
지금까지는 말많은 시민단체 언론이 편들어줬지만
앞으로도 그럴까요
이제는 시민단체가 행정과 언론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단체 또한 비판받아 마땅합니다.
만약 행정이 평화학교 했다면
그 말많던 그 단체 사람들 가만히 있었을까요
지난해까지 도청 앞에서 교육시장ㄴ 개방 반대와 교육 공공성 강화를 그렇게 외쳐대다가 정작 자신들은 공공성 강화에 역행하는 이중적인 행태를 보이고 있으니...
제주 시민운동 몇몇 이기적인 사리사욕에 잡힌 인사들땜에 망신당하고, 이제 시민들로부터 비판의 도마에 오르게됐으니 이 일을 어찌할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