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도 없고, 군량도 없고, 왜구에 대한 정보도 없었다”
“군사도 없고, 군량도 없고, 왜구에 대한 정보도 없었다”
  • 김형훈 기자
  • 승인 2022.08.10 05:4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을묘왜변 따라잡기] <2> 허약한 조선의 대응

싸울 준비기 전혀 되지 않은 ‘총체적 부실’

왜구의 침략 전조에 대한 정보도 믿지 않아

초기대응 제대로 하지 못한 문제점도 지적

[미디어제주 김형훈 기자] 우리에게 익숙한 왜구는 맨발에 아랫도리는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는, 아니면 아랫도리는 가릴 것만 가리고 있는 모습이다. 그들의 머리는 머리카락을 면도한, 그러니까 정수리까지 민머리인 일명 ‘사카야키[月代]’라고 불리는 형태였다.

중국 명나라 때 제작된 ‘항왜도권(抗倭圖卷)’에 왜구의 모습이 잘 표현돼 있다. 두루마리 형태의 그림인 ‘항왜도권’은 왜구가 명나라 해안을 침입하는 과정과 명나라 군사들이 왜구를 물리치는 장면을 가로로 길게 표현했다.

도쿄대 사료편찬소는 ‘항왜도권’을 설명하면서 “왜구의 모습을 전하는 거의 유일한 회화 사료로서 가장 사료적 가치가 높다고 여겨진다”고 평가할 정도이다. 도쿄대 사료편찬소가 높이 평가한 ‘항왜도권’을 찬찬히 훑어보면 우리가 상상으로 여기던 왜구의 모습을 마주할 수 있다. 맨발에 윗옷만 입었고, 머리는 ‘사카야키’ 형태를 띠고 있다. 도쿄대 사료편찬소가 ‘항왜도권’의 가치를 높게 평가했다면, 왜구의 평소 모습이 어떠했는지 짐작은 가능하다.

'항왜도권' 중 왜구들이 상륙하는 장면이다.

더욱이 ‘항왜도권’은 조총으로도 불리는 ‘철포’ 모습도 보인다는 점에서 그림이 작성된 시대를 가늠할 수 있다. 도쿄대 사료편찬소는 “그림 중에 왜구 한 명이 철포를 지닌 점으로 보아 후기왜구를 묘사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일본 중학교 교과서에 ‘철포’ 관련 부분을 들여다보면 “1543년, 시네지마에 표착한 왜구의 배를 타고 있던 포르투갈인에 의해 일본에 철포가 전해졌다”고 나온다. 그렇다면 ‘항왜도권’은 1543년 이후의 상황을 묘사한 내용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을묘왜변이 1555년에 일어났으니, 전남과 제주에 들어왔던 왜구들은 ‘항왜도권’에 등장하는 이들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 같다.

여기서 잠깐! 왜구는 고려시대부터 우리나라 해안을 침범해왔는데, 왜구가 종식될 때까지 같은 조직은 아니었다. 때문에 왜구를 구분하기 위해 ‘전기왜구’와 ‘후기왜구’로 구분한다. ‘일본사사전닷컴’(nihonsi-jiten.com)을 참고하면 “역사에서 배우는 왜구는 13세기부터 16세기에 동아시아에서 해적 행위를 하고 있던 사람들이다”고 한다. 전기왜구는 13~14세기로 가마쿠라 시대 말에서 남북조 무렵에 활동하던 무리였고, 후기왜구는 15~16세기였던 전국시대에 바다를 누렸던 무리였다고 일본사사전닷컴은 설명한다. 그러나 전기왜구를 14~15세기, 후기왜구를 16세기로 다르게 보기도 한다.

어쨌든 명종 10년(1555) 전남과 제주를 침범한 왜구들은 후기왜구에 속한다. 이들은 쓰시마(대마도)를 근거로 삼던 왜인과도 달랐다. 조선은 왜인들을 통제하기 위해 대마도에 대한 관리에 신경을 썼지만, 후기왜구는 다국적 해적집단으로 조선의 통제 대상과는 아예 거리가 멀었다.

을묘왜변이 닥치기 전, 명종 즉위년(1445)부터 명종 9년(1554)까지 왜구가 우리나라를 침입한 횟수는 모두 12차례였다. 대부분은 전남과 제주에 출몰했다. 전남은 7차례, 제주는 4차례였다. 나머지 한차례는 경상도 울진이었다. 명종 9년까지 12차례의 침입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다. 그러다 터질 게 터진다. 1555년 을묘왜변이다.

을묘왜변 초기, 조선은 연패를 거듭한다. 변명의 여지가 없는 연패였다. 그렇다면 왜 왜구에게 당하기만 했을까. 《명종실록》을 들여다보면 이유가 확연해진다. 왜구는 1555년 5월 11일 달량포구 인근에 진을 쳤고, 이틀 뒤 달량성을 포위한다. 명종은 5월 16일 관료들과 이 문제를 논의하는데, 실록에 담긴 기록은 당시 조선의 대응이 심각했음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5월 16일 《명종실록》에 담긴 기사에서 읽을 수 있는 문제점은 △왜구에 대한 정보 부재 △병력·군량·무기 부족 △초기대응 실패 등을 들 수 있다. 그야말로 ‘총제적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그렇다면 5월 16일 《명종실록》에 실린 기사를 통해 조선이 지닌 문제점을 들여다본다.

을묘왜변 이전부터 대마도주(對馬島主)는 왜구들이 조만간 공격해올 수 있다는 문서를 보내곤 했다. 그러나 제대로 귀에 담지 않았던지, 명종은 “오늘의 일로 본다면 대마도주의 말이 터무니없는 것이 아닌 듯하다”고 했다. 당시 조선은 국제 정세를 제대로 읽지 못했고, 외부에서 들어오는 정보마저 불신하고 있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왜구의 움직임에 대한 제대로 된 정보 파악도 부실했고, 왜구의 군사력도 파악하지 못했다. 후기왜구는 중국인들이 포함돼 있어서 예전 왜구와는 질적으로 차이를 보였다. 튼튼한 배를 보유하고 있었고, 장비도 업그레이드된 상태였다. 명종과 대화를 나누던 영의정 심연원이 왜구의 군사력을 다음처럼 표현하고 있다.

“전에 왜선은 얇은 판자로 만들었기 때문에 부수기가 매우 쉬웠는데, 지금은 중국인들과 교통하며 배를 아주 견고하게 만들어 총통으로 부술 수가 없습니다. 또한 왜놈들이 사용하는 총통이 극히 교묘하므로 지금은 왜놈들을 막기가 그전보다 어렵습니다.”

정보 뿐만 아니었다. 병력도 부족했고, 군량도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싸우려면 무기가 잘 갖춰줘야 하는데 그것도 말이 아니었다.

조선은 전략적 무기는 총통이었는데, 을묘왜변 때는 총통도 마련하지 못했다. 이유는 동철(銅鐵) 부족이었다. 일본에서 동철을 수입, 총통을 제작해야 했는데 원재료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을묘왜변이 터지고 나서 조선의 동철 수입은 늘게 된다. 때늦은 수습이었다.

을묘왜변 시점엔 흉년이 들어 먹을 게 부족했다. 장수도 부족했고, 병졸도 마찬가지였다. 군적에 기록된 인원이 실제로는 복무하지 않는 일이 허다했기에 싸울 사람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5월 16일 당일 전라도순찰사 임무를 맡게 된 이준경은 상중(喪中)에 있는 무신이라도 데리고 싸울 수 있도록 해달라고 하는 건 물론, 무신 중에 죄를 지은 사람들도 급히 쓸 수 있게 해달라고 호소했다.

초기대응 실패도 5월 16일 도마에 올랐다. 70여 척이라는 적지 않은 숫자의 적선이 바다를 떠돌아다녔는데 그걸 파악하지 못했으니, 한심하다고 여길 수밖에 없었다. 그 문제는 이준경 순찰사가 지적했다.

“침범한 왜선이 70여 척이 되는데도 끝내 알지 못하고 있다가 포위당했으니 이는 조심해서 망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한심스러운 일입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